나는 어쩌다 건축 설계를 하게 되었나 - 과거(1)

2023. 2. 8.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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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 정체성 찾기 02

나는 어쩌다가 건축 설계를 하게 되었나 - 과거(1)

- 장래희망에서 건축과를 졸업하기까지


1. 건축가라는 장래희망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몇 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딱히 장래희망이랄 것도 없었던 어린 나이에 아빠한테 종종 그런 말을 했었다. “나중에 어른되면 아빠 100층짜리 빌딩 지어줄게요!” 기껏해야 설거지 한 번에 500원 받던 주제에 얼마만큼의 돈이 드는지도 모르고 했던 철없는 소리에도 아빠는 친구들을 만나면 나중에 딸이 100층짜리 빌딩 지어주기로 했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아직 1층짜리도 짓지 못하네요 죄솸다 아버지..) 아마 그때부터 건축가의 꿈을 꾼 건 아니었을 거다. 빌딩은 건축가가 짓는 게 아니라 돈이 짓는 거니까. 물론 그때엔 그 무엇도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미디어로 처음 건축가라는 사람을 본 건 ‘러브 하우스’였던 것 같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주거환경이 열악했던 사람들의 사연을 받아  집을 지어주던 주말 프로그램이 있었다. 신동엽이 진행했고, 몇 명의 건축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출연하여, 낡은 집을 고치거나 거의 새로 짓기도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돌이켜 보면 건축가라는 사람보다는 계단을 열면 수납공간이 있다던가, 귀여운 다락방이 있다던가 하는, 주변 친구들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간들에 신기해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미디어에서 건축을 다룬 프로그램이 있었다.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의 코너였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의 프로젝트로, 도서관이 없는 전국 각지의 마을에 도서관을 짓는 프로그램이었다. 열 맞춰 늘어선 책장과 남는 공간에 책상이 다시 열 맞춰 있던 도서관이 아닌, 놀이터 같은 도서관을 보며 저런 걸 만드는 일은 참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도서관 설계는 2011년에 돌아가신 건축가 정기용 선생님이 맡았었는데, 당시 기용건축의 직원이었던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는데 극악무도한 살인적인 일정이었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나의 꿈이 시작되었는지는 되짚어보아도 결정적인 포인트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저 시절 두 프로그램으로 인해 건축과로 진학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아니었다고 부정하고 있지만.

2. 나는 왜 건축과를 선택했을까.


꼭 이길로 가야겠다는 원대한 꿈은 없었다. 다만, 다른 건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전공선택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걸 찾은 게 아니라, 하기 싫은 것과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을 빼고 나니 건축만 남았었으니까. 문과냐 이과냐의 기로에서 1차적으로 인문계열의 전공이 걸러졌다. 원래부터 문과계열 과목은 아무리 외우려 해도 외워지지 않았고, 원리만 이해하면 과학과목은 어렵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원리를 알고 답을 찾아낼 때 짜릿한 수학도 재미있었고.(적분부터 포기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관심이 있었던 장르에는 미술이나 시각디자인, 영상디자인, 그래픽디자인 같은 것들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 공부보다는 해외 영화와 드라마를 다운받아 보거나, 해외의 다양한 예술작품세계가 들어왔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들어 내는 쪽보다는 순전히 보는 쪽에만 흥미가 있었고, 창의력이나 예술적인 감각 같은 건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상태였다. 그렇게 하기 싫은 일과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걷어내고 나니 건축만이 남아있었다.

그 무렵 싸이월드에서 어떤 이유로 건축을 한다는 분의 미니홈피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건축과를 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 뭘 하는 건지 몰랐던 나는 건축과는 어떤 곳인지, 건축과에 가려면 어떤 걸 잘해야 하는지(그림을 잘 그려야 하는지 같은), 건축과를 졸업하면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물어봤던 것 같다. 그분의 이름도 그분의 대답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열정이 있었나 보다.

3. 건축과 입학 그 후.


학교생활은 재미있었다. 원했던 학교가 아니었어서 처음에는 좀 방황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했다. 그게 문제였다. 설계수업과 다른 전공수업들은 생각한 것과 달랐고, 수업 밖과 학교 밖에 있는 것들이 너무 재미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설계실보다 도서관에서 최진 잡지와 멋진 건축물이 담긴 책을 보는 게 좋았고, 소설책을 보는 게 좋았다. 성적은 근근이 채웠고, 방학이면 서울에 올라와 미술관과 박물관을 쏘다니는 게 좋았다. 급기야는 휴학을 하고 서울에서 살며 놀기에 바빴다. 물론 그 시절에 설계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보았다. 그건 역시 재미가 없었다.

4. 건축설계는 아무래도 무리일지도.


복학 이후에는 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휴학 전과 다르게 설계성적도 끌어올렸다. 신입 공채시즌인 가을부터 설계사무소에 이력서를 밀어 넣었다. 4.0을 못 넘은 성적인데도  지원한 회사 중 몇몇 회사에서 희한하게도 서류를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럭저럭은 만든 포트폴리오와 프로젝트 수보다 많은 다양한 경험들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면접에서 족족 떨어졌다. 면접에서 너무 긴장하고 벌벌 떠는 편이어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다 못하고 나오는 내가 문제였을 것이다. 어차피 설계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공채시즌이 끝나고 나서는 인테리어 디자인 사무소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내보았다. 연락이 왔고,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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