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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 정체성 찾기 03


나는 어쩌다 건축 설계를 하게 되었나 - 과거(2) 
- 내가 다닌 다섯 곳의 회사


1. 나는야 이직 메뚜기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나, 이력서의 내용만 본다면 나는 이직 메뚜기이다.
첫 직장에서 1년 8개월, 두 번째 직장에서 3년, 그리고 2년 2개월, 8개월, 마지막 다섯 번째 직장에서 3년을 일했다. 첫 직장에서 두 번째 직장으로 옮길 때는 이유가 명확했었고, 두 번째에서 네 번째 까지는 사유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직 제안, 추천 뭐 그런 것들이었으니까. 다섯 번째 직장으로 이직을 하기 위해 면접에서는 당연히 이전 회사들의 이직 사유와 비교적 짧아 보이는 근속 연수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다. 납득이 갈만한 이유였고, 채용을 결정한 그 이외의 사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지금 여섯 번째 직장으로의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하나 더 늘어난 이전 직장의 개수가 어떻게 보일지는 잘 모르겠다. 평생직장이랄 게 있나 싶은 요즘이지만 채용자 입장에서는 짧게는 1년, 길어야 3년 일하고 나갈 사람은 달갑진 않을 테니까. 근데 뭐 누군 오래 있기 싫어서 오래 안 있는 거 아니잖아요.


2. 첫 번째 회사.

 

첫 회사 경험은 재미있었다. 재미로 따지면 10년간 다닌 회사 중 가장 즐겁게 일했던 곳이다. 책임감이 적게 따르던 시절이어서 가능했던 즐거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첫번째 화사에서 하는 일은 주로 상공간 인테리어 프로젝트 위주였다. 나는 입사 후 몇 개월동안은 리테일샵에 들어가는 집기들을 어떻게 만들지 회의를 거쳐 제작 도면을 그리는 일을 했었다. 인테리어 업무 특성상 건축에 비해 일의 시작과 마무리의 주기가 짧아서 설계사무소에 다니는 친구들이 한 프로젝트의 반의 반도 진행하기 전에 공사가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왠지 일을 빨리 배우는 것 같았고, 성과를 빨리 이루어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객의 입장에서 구경하던 의류 매장이나, 공간들을 일을 하기 위해 드나드는 일도 왠지 모를 뿌듯함이 있었다. 길을 가다 공사가 끝나고 영업을 하고 있는 몇몇 장소를 지날 때면, 함께 있던 사람에게 내가 저기 인테리어 디자인에 참여했던 이야기 하면서 괜히 어깨가 올라가곤 했다. 

일이 한꺼번에 많이 몰렸을 때 우왕좌왕 하지 않고 침착하게 꺼내놓고, 모여서 우선순위를 따져서 차근차근 순서를 정하고,  한씩 지워가며 처리해나가는 것은 이때 배운 것들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일이 왕왕 있긴 하지만 대체로 침착하게 대처하려 노력한다.

프로젝트 순환 주기가 빠른 만큼 성취감도 빨리 찾아왔으나 그만큼 거기에 빨리 익숙해졌다. 남들과는 다른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이 당연한 그 업계에서 1년차가 지나고 나니, 프로젝트 전체의 안을 제안해야 하는 시점이 왔을 때 나의 한계가 찾아왔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나에게선 나오지 않았다. 내가 제안한 심플한(심심한) 공간은 매번 클라이언트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공간을 다녀오고 사진을 보아도 그쪽으로는 감각이 뻗질 않았다. 그즈음 회사경영이 악화되었고, 월급이 쪼개어져서 나오거나, 늦게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직을 결심했다.


3.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회사.


첫회사 면접당시 어떤 공간을 디자인해보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주택과 주거공간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상공간 위주였으나, 가끔 주거 인테리어 프로젝트도 있으니 함께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다니는 동안은 그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건축설계사무소에 지원하기로 했다. 5년이나 학교를 다녔는데 전공은 살려봐야지. 주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을 알았던 친구가 사무소 한 군데를 소개해주었다. 다양한 사무소에 지원해보려 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가구/다세대 주택과 상가(근린생활시설)와 주거가 함께 있는 상가주택 프로젝트를 정말, 정말 많이 진행했다. 굉장한 디자인을 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합리적인 설계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나고 3년이 되며 깨달았다. 여태껏 제대로 된 실시도면을 못 그린다는 것을. 늘 기본설계까지만 하고 인허가를 받고 허가도면을 넘기고 나면 다음 프로젝트, 다음프로젝트로 넘어갔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법규를 확인하고, 검토하고, 의뢰받은 대지에 적용하고, 규모를 산출하고, 주차장과 출입구, 계단,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정하며 평면을 계획하고, 창은 어디에 어떻게 내며, 입면은 어떻게 보여지게끔 하며 재료는 무엇이 좋을지 정하는, 맨 땅에서 건물이 지어지기 까지의 과정을 현장을 보고, 도면을 그리고, 공사과정을 확인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정도 까지다. 프로젝트 하나를 나에게 끌고 가라고 맡겨준다면 내가 과연 혼자서 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10년간 칼퇴보다는 야근한 날이 더 많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일했는데 난 왜 그 정도까지인 걸까. 왜 그 정도 까지라고 나 자신을 생각하게 된 걸까. 말 그대로 그냥 '일'만 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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