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Her, 2013)'에 등장하는 건축과 공간들
챗GPT(ChatGPT)로 시끌시끌한 요즘입니다. 쳇GPT를 이용하면 키워드로 검색을 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해주는건 그다지 별일도 아닙니다. 내 여행코스를 짜주기도 하고, 과제를 해주기도 하고, 자소서를 써주기도 하지요.
곧 있으면 챗GPT가 무료한 현대인들의 친구가 되어줄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영화 <그녀(Her, 2013)>처럼요.
10년전에 나온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 1969-)감독의 영화 <그녀>에는 주인공 테오도르역의 호아킨 피닉스 외에 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사만다라는 이름의 그녀는 우리에게 마블의 블랙 위도우로 익숙한 스칼렛 요한슨이 목소리 출연을 했죠. 왜 목소리만 출연했냐구요? 사만다는 실제 인물이 아닌 OS 이자 AI 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챗 GPT처럼 그녀는 궁금한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도 하고, 함께 수다를 떠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며, 애인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10년전 공상과학 영화속의 일들이 점점 현실이 되어갈 것만 같은 지금 보아도 영화는 무척 재미있고, 아름답습니다. 인간의 외로움과, 욕구와 같은 디테일한 감정을 다루면서 영화속에 등장하는 배경이 미래와 현재를 적절히 섞은 듯한 오묘한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서두가 길었지만 이번 글은 AI에 대한 내용도, 영화 줄거리에 대한 내용도 아닙니다. 다방면으로 바라봐야할 영화이긴 하지만, 그쪽은 많은 전문가들이 한 이야기들이 있으니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걸로 정리해봅니다.오직 영화 <그녀>에 등장하는 건축과 공간에 대해서만요.
영화속 시대적 배경은 특정하긴 힘듭니다. 현재인 것 같기도하고 미래인것 같기도 하죠. 멀지 않은 미래의 도시 정도로 해둘까요? 삭막한 빌딩들, OS와의 대화와 관계 등 많은 요소들이 머지않은 현실과 (어쩌면 이미 일어나고 있는) 닮은 듯하면서도 어느정도의 판타지스러움과 생경함이 슬쩍슬쩍 묻어나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먼지한톨 없는 각잡힌 수직도시'정도 될까요. 그리고 영화 초반부의 배경을 채우는 주인공은 단연, 핑크 입니다.
주인공 테오도르가 다니는 회사의 인테리어에서는 단연 핑크가 돋보입니다. 테오는 회사에 출근할 때 주로 핑크나 레드 계열의 옷을 입습니다. 이렇게 정해진 컬러의 조합은 (당연하겠지만) 영화 감독과 제작 디자인 감독의 치밀한 고민끝에 탄생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공간과 장소는 세트가 아닌 실제로 있는 곳입니다. (제가 정말 열심히 찾아봤거든요..) 테오의 회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띠오도르가 일하는 회사는 미국 LA의 400 South Hope 빌딩입니다.
400 South Hope는 1982년에 완공된 26층의 복합시설 빌딩으로 미국 건축가 윌튼 베켓)Welton David Becket, 1902-1969)가 설계했습니다. 윌튼 베켓은 LA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주로 활동한 건축가로 LA에 설계한 건축물만해도 수십개가 된다고 합니다.
넓고 긴 사무실 공간은 가로로 쭉 뻗은 공간덕에 관객으로서의 시야가 저 멀리 소실점을 향하다가 다시 가까이의 사람과 가구를 들여다 보게 합니다. 최신식(?) 미래형 오피스를 그리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그 공간을 채우는 가구는 20세기 중반 모던 가구들입니다.
영화는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는 SF영화지만 사실상 시대를 특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현재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는 도시를 마냥 삭막하게만 그리지 않고, 어딘가 따뜻한 요소를 표현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 공간을 스크린에 담아 내었습니다.
칸막이의 다홍빛 만으로도 포스터에서 느꼈던 이 영화의 이미지가 다시 한번 각인 되는데요, 회사 직원들이 쓰는 의자는 1950-1960년에 디자인된 찰스&레이 임스의 사무용 의자 입니다. 한가지 아이템만이 아니라 여러 버전의 의자들이 등장합니다. 책상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 마저도 20세기 모던 디자인 시기에 제작된 제품일 것 같은데,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없는 눈이 원망스럽군요..
올리브 그린색의 의자는 아주 옛날 할머니집 냉장고에서 많이 봤던 색상이죠. 모더니즘과 레트로를 특정할 수 없으면서,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낸 공간연출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사무실의 불이 꺼지면, 낮의 따뜻함이 반감되고 삭막한 저녁이 찾아옵니다. 외로운 현대인은 그렇게 터덜터덜 집으로 갑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실제 공간적 배경은 미국과 중국을 오고갑니다. 회사는 미국이었는데, 문을 나오면 중국이고 그렇습니다. 영화는 두 도시의 건축물을 이용해 영화속 세계를 구축합니다.
영화 감독인 스파이크 존스와 제작 디자이너 베럿(K.K. Barrett)의 말에 따르면, 영화는 디자인이나 건축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주인공 띠오도르의 감정적 자질을 제작 디자인을 통해서 반영하는데에 관심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미래는 멀고 이국적으로 느껴지지만 "미래는 누군가의 현재이기도 하고, 우리의 캐릭터가 현재이기도 하다"며, SF적인 요소들이 모두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그녀>의 미래 세계는 그러한 생각들을 염두해두고 설계한 것이라고전합니다.
그래서 띠오도르가 퇴근하고 탄 엘리베이터 장면은 미국이 아닌 중국 상해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은 상해의 Hyatt on the Bund Hotel 입니다.
띠오도르는 집에 도착합니다. 이 날의 장면은 띠오도르가 핑크빛 셔츠 밖에 다홍빛 자켓을 입음으로써 사무실에서의 이미지가 연결되면서도 각잡힌 현대사회에서의 외로움을 돋보이게 해줍니다.
이 영화의 제작 디자이너인 베럿(K.K. Barrett)은 영화의 컬러 팔레트를 떠올렸을 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감독의 <붉은 사막(Red Desert,1964)>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전에 참여한 영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Extremely Loud & Incredibly Close,2011)>의 주요 장면에서도 붉은 벽을 사용했었는데요, 빨간색은 매우 수동적인 색이지만, 존재감이 끈질긴 색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빨간 외투를 입은 테오도르의 잔상이 오래남는 것이었나봅니다.
집으로 도착한 띠오도르. 1층 로비는 다시 미국 LA입니다. LA Down Town의 럭셔리 아파트 WaterMarke Tower Apartments이고, 주인공의 집은 꼭대기 층에 있습니다. (홈페이지도 굉장히 멋져요!)
조명도 어쩜 또 핑크네요.
거실에는 식탁은 없고, 의자 세개만이 덩그러니 있습니다. 정착하지 못한 주인공의 심리를 반영합니다. 식탁의 의자는 주로 2개, 4개 이렇게 짝수로 구성이 되는데 왜 세 개만 덩그러니 있었을 까요. 영화 후반부에서야 발코니에 있는 나머지 의자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집은 실내 디자인 보다는 전망 때문에 선택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 곳을 찾기전에 원하는 경치가 있는 건물의 옥상에 세트를 지으려고도 했었다고.
인테리어 저널에서 주인공 테오도르의 집 평면도를 그렸습니다. 가구 표현까지 디테일합니다. 영화를 공간적으로 분석하고 도면으로 표현한 자료들이 많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방문해보세요. 재미있는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의 집은 미국 LA의 Water Marke Tower Apartment 이고 창밖 풍경도 미국인데, 집 밖으로 나오자마나 중국의 상해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중국 상해의 루자쭈이 금융무역지구입니다. 초고층 빌딩이 100채 이상 들어서 있는 도시죠.
여긴 LA 구요,
여긴 다시 상해 우지아오창(五角場) 입니다. 뒤로 보이는 우주선 같은 건물은 우지아오창 메트로 스테이션이구요.
우지아오창 메트로 스테이션 아래를 걷는 호아킨 피닉스입니다.
걷고 걷다보니 띠오도르는 다시 미국 LA에 도착합니다.
건축을 공부했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텐데요, 뒤에 있는 건물은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설계로 2003년에 문을 연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Walt Disney Concert Hall)입니다.
LA 111 South Grand Avenue에 있는 건축물로 월트 디즈니의 아내이자 잉크화가였던 릴리언 디즈니가 무려 2억2700달러를 후원하여 지은 건물입니다. 원으로 환산하면 약 2600억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영화에서는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데요,
바로여기. 풀샷으로 보면 이렇게 생겼습니다.
또다른 영화에서는 나탈리 포트만과 에쉬튼 커쳐 주연의 <친구와 연인사이(No Strings Attatched, 2011)에 멀찍이 아주잠깐 등장했던 적도 있어요. 기억이 나서 가져왔습니다.
영화 <그녀>에 등장하는 건축과 공간들은 여기까지입니다. 많이 찾은 것 같은데 몇개 되진 않네요..
마무리는 고독한 띠오도르의 뒷모습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랍니다.
😘 도움이 되셨다면 공감과 댓글을 남겨주세요. 공감과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 오랜 시간이 걸려 작성한 글이오니, 그대로 가져가는 일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과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르 꼬르 뷔지에와 일본 건축 현상설계의 뒷담화(앞담화)를 하는 일본 건축가의 책 (2) | 2024.02.20 |
---|---|
아름다운 공간을 볼 수 있는 따뜻한 SF 영화 '백조의 노래(Swan Song, 2021)' (4) | 2023.03.01 |
국제 문화 회관 다큐 (0) | 2023.02.21 |
건축 다큐멘터리 추천 <Koolhaas Houselife> (0) | 2022.09.28 |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일본건축책들 - [건축지식(建築知識)], [BEAMS AT HOME 3] (0) | 2017.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