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 흙갈피》전 관람기록 @BHAK
2023. 3. 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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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 흙갈피
@ 갤러리 BHAK
2023.03.02. ~ 04.08.
무료
윤형근 화백의 목소리가 담긴 RM의 Yun을 함께 감상해보세요오
갤러리 박에서 열리고 있는 윤형근 화백의 <흙갈피>전에 다녀왔다. 전시 작품 수는 8점으로, 1층의 2점은 밝은 공간에, 지하는 어둡게(거의 깜깜하게) 연출하여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6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불안했던 상황에서 올곧게 땅을 딛고 서있는 화가의 그림은 어딘가 건축적(?)이다. 묵직하고 중력을 가득 받고 있지만, 굳건한 느낌이 든달까. 언젠가 윤형근 미술관이 생긴다면 꼭 그의 그림과 닮아있기를.
예술은 이론을 가지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천진무구한 인품(人品)에서만이
영원불변한 향기로운 예술이
생설될 것임을 절감한다.
1979年8月19日
윤형근 일기 中 에서
갤러리 BHAK
갤러리 전시소개 전문
윤형근 : 흙갈피 |
별다른 대상의 재현이나 장식이 없는 윤형근의 그림은 캔버스 위로 물감을 적신 붓이 지나간 흔적과 같다. 유사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붓자국의 형태는 윤형근이 물감을 오일(테레빈/ 린시드)에 풀어 어떻게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하느냐에 따라 각기 형상화된 결과다. 일반적으로 윤형근의 작품 양식은 세가지로 설명한다. 먼저는, 70년대 초 활동 초기에 장인 김환기(1913-1974)의 학풍을 엿 볼 수 있는 색면 추상이고, 다음은, 70~80년대에 농도와 번짐이 강한 두세개의 기둥과 그 사이의 여백으로 구성된 천지문(天地門) 양식이고, 마지막은, 번짐은 절제되고 먹빛에 가까운 검은 기둥면이 강조된 90년대 작품이다. 이 단순한 조형 언어는 윤형근이 한결 같이 유지했던 양식으로서, 이는 작가가 구축한 고유한 화풍을 나타낼 뿐 아니라 작품과 결부된 화가의 인생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시각 요소다. 많은 화가들의 작품처럼 윤형근이 캔버스에 붓으로 그리던 그 무엇 역시 현실에 깊숙이 관여된 것이었다. 충척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윤형근(1928-2007)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국 근현대의 격동기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1947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국대안(국립대학교설릷안)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 후 제적을 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학창시절 시위 전력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956년에는 전쟁 중 피란 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인민군의 강제 부역을 했다는 명목으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으며, 지원으로 부정 입학했던 학생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1950년 6월 27일 윤형근은 40여명의 동료 대학생들과 함께 총살대열의 14 번째 줄에 서 있었으며 다섯 명의 생존자 중 하나였다. 오상길과의 대담에서 윤형근은 보도연맹에 불려 나온 450여 명이 거의 모두 총살당했다고 구술했다. 여러 번의 복역과 죽을 고비를 넘긴 윤형근은, 참혹하고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치미는 울분을 캔버스에 토로했던 것 같다. "형무소에서 나와서 이제껏 그렸던 그림들을 전부 부숴버리고, 독기를 내뿜었어요. 73년도부터 그림이 확 달라진 계기는 이런 이유에서에요... 처음에는 원색인데 그 위에 덧그리니까 까맣게 되고, 아예 검게 만들어 버리고 싶어 울트라 마린하고 번트 엄버를 물하고 섞어 먹빛으로 그린 것이에요." "내 작품 안에 청춘의 공백 같은 게 나타나 보일지 몰라요. 도망다니다 쫓겨 다니고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제일 큰 문제였지요." "내 그림은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삶의 핵은 올바른 삶. 그 체험을 함축 시킨 것이 내 그림이죠.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그 체험에서 오는 어떤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듯이 그림도 거기에 따라 저절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림이라는 것은 삶의 체험에서 오는 하나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겠죠." (2003) 윤형근은 하얀 캔버스 대신 누런 마포 천을 캔버스 삼아, 다색(Umber)과 청색(Ultramarine-Blue)을 땅과 하늘의 색이라 명명하며 그림에 끌어들였다. 그는 작업실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분풀이를 하듯 위에서 아래로 물감을 반복해서 그어댔다. 그의 작품에 새겨진 흥건한 붓 자국은 흙 속에서 뻗어 나오는 절규 같기고, 아지랑이처럼 번진 붓 자국은 흐느끼는 울음 소리 같기도, 화면을 가득 채운 검은 붓자국은 고통에서 마침내 해방된 침묵의 소리 같다. 이처럼, 윤형근의 붓질이 만든 흔적은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는 그림으로 당시의 현실에 저항하고 내면의 고통과 슬픔을 애도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뉴는 윤형근이 세상을 바라보는 근원적인 시선에 바로 자연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오육년 전 일이다. 오대산에 오른 일이 있다. 낙엽이 진 산협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산허리에 가로누워 썩어가는 거목을 발견했다. 뿌리 쪽부터 흙으로 변해가는 그 광경을 한참동안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마나 자연의 거룩함인가. 나는 그 광격을 보고 자연의 신비, 자연의 섭리를 새삼 깊은 감명에 잠겼던 일이 생각난다." (1986) 윤형근은 땅에 뿌리를 내렸던 나무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모습을 목도하며 자연의 신묘함과 영적인 깨달음을 체험하였고, 이를 자신의 삶과 예술을 창조하기 위한 재료로서 사용하였다. 흙벽과 어우러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윤형근의 말처럼, 90년대에 제작된 작품은 땅으로 귀결하고자 하는 그의 예술의 핵심을 더욱 잘 드러낸다. 나는 내 보잘것없는 그림들이지만 그 그림들을 흙벽에 걸고 싶다. 그 흙벽에 잘 어울리는 그 무엇을 그려보고 싶다. 이 세상이 아무리 세월이 가도 영원히 아름다운 것은 흙과 나무의 돌이리라. (1990) 윤형근의 후기 작품에는 불기둥처럼 솟아 오르던 기둥들이 캔버스에 잠잠히 가라앉은 모습이다. 울분으로 얼룩져 있던 붓 자국, 땅과 하늘의 사이를 의미하는 천지문 구도는 거의 사라졌다. 마포천 위에는 정제된 흑색 기둥만 존재한다. 화면에 자연스레 스며든 흑색 기둥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흐리며 캔버스와 한 몸이 되어 지평선처럼 고요히 펼쳐져 있다. 마치 생을 다하고 자연으로 회귀하던 오대산의 나무 처럼. 말년의 윤형근의 그림에서는 고통, 슬픔과 같은 불순물은 승화되고 거룩함이 흐르는 듯하다. 이러한 조형 언어는 윤형근이 그의 일생을 마무리하며 또한 완성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가운데 삶의 마지막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윤형근의 그림이 주는 마지막 인상은 시작과 끝, 타냉과 소멸이 있는 땅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모습이다. "잔소리를 싹 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그림". 이 말은 윤형근이 생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그림을 평가한 내용으로, 자신의 그림과 대조적으로 장인 김환기의 그림은 "잔소리가 많고 하늘에서 노니는 그림" 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윤형근은 삶과 예술이 뿌리 내리고 있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땅'으로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땅은 물리적, 정신적 대상으로서 다중적인 장소였던 것 같다. 그에게 땅은 먼저 현실에서 발을 딛고 있는 땅과 과거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비극의 죽음을 의미한다. 다음은, 모든 만물이 회귀하는 장소로서의 땅과 미래의 죽음을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자연을 닮아 있는 윤형근의 그림을 일컫는다. 바로 이러한 땅의 흔적들, 윤형근이 남긴 삶과 예술의 흔적으로서의 예술을 전시명 '흙갈피 Umber mark'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지금도 잘 모른다. 그저 생명이 연소된 흔적과 같은 것은 아닐까 싶다. (공방단상 中) 과거 예상치 못한 죽음의 문턱 앞에서 다시 삶으로 회기한 윤형근. 연장된 삶 위에서 출발했던 그의 예술은 과거이자 미래가 된 죽음과 떼어 놓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윤형근의 그림은 삶의 현상 이면에 도사린 비극을 직면하고, 이를 자연의 섭리로 수용하고, 또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예술이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영원히 슬픔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애통한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하기까지 한다. 윤형근의 그림은 영원한 슬픔 대신 진정한 희락이 있는 아름다움을 체험케하는, 그런 깊은 승화의 예술인 것이다. "감동이란 인간사 희비애락(喜悲哀樂)과 같다. 희(喜)는 곧 차원을 뒤집으면 비(悲)가 아닌가? 즉 가장 아름다운 것은 희(喜)요 곧 비(悲)다. 그래서 예술은,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슬픈가보다. 그래서 가장 슬프면 눈물이 나고 가장 기뻐도 눈물이 나오게 마련인가보다." (1980) 글 임소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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