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건축가 : 자하 하디드 (1)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 (Dame Zaha Mohammad Hadid)
(1950.10.31.-2016.03.31)
안녕하세요 이름모를 방문자님. 건축과 관련된 여러이야기를 써보고자 호기롭게 시작해보는 첫 번째 글입니다. 아마 '자하 하디드'를 키워드로 이 곳에 들어왔을 확률이 높으실텐데요. 일단 저의 <날 위한 건축문화> 첫 번째 글을 보러 와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글을 써보기로 한 이유는 제목에서 적어둔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건축가' 이기 때문입니다. 자하 하디드는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건축가. 프리츠커상의 최초 여성 수상자. 독특하고 독보적인 건축 디자인으로 알려진 건축가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유명한 몇몇 건축물과, 이라크출신(이라크에서 태어난 이라크계 영국인입니다.)으로서의 외모와 아방가르드한 블랙패션에서 느껴지는 이미지 외에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더라구요.
자하 하디드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취향의 문제에서건 건축프로세스와 비용 및 환경에 관한 문제에서건 호불호가 다양하게 나뉘어 집니다. 취향이나 평가를 차치해두고서 2016년 세상을 떠난 후 사후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는 건축가이면서 건축계에 수많은 이슈와 역사를 남긴 건축가에 대해서 더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건축가들이 건축물 외에도 각종 인터뷰나, 잡지에 글을 올리거나, 책을 내곤 하는데요. 자하 하디드는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작품집 외에 자하 하디드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일본에서 펴낸 <자하 하디디가 이야기하다(ザハ・ハディッドは語る,2010)>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궁금해졌죠. 자하 하디드가 남긴 것은 오직 자신과 자신의 회사에서 설계한 건축물과 관련 이미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강의와 인터뷰 영상이 전부입니다. (사실 그것만 해도 너무 방대해서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하긴 합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여성의 사회활동 비율이 현저히 낮은 이라크 출신으로서, 또한 남성이 주를 이루는 건축계에서 여성으로서의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도 발견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일단은 자하 하디드의 어린시절 부터 그가 남겨온 궤적을 따라가보기로 했습니다.
1. 자하 하디드의 어린시절 (1950 ~)
자하 하디드의 풀네임은 Dame Zaha Mohammad Hadid. 1950년 10월 31일에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국가민주당 대표를 지낸 정치인이었고 어머니는 미술을 공부한 부모님 모두 명문가 출신 집안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죠. 그야말로 금수저 집안 ㅇㅇ. 당시 이라크는 지금의 위험하고 폐쇄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국제적이며 진보적인 도시였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문화적 실험으로 가득 차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절에 자하 하디드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자하 하디드가 살던 커다란 집의 자신의 방에는 모더니즘 스타일의 가구로 채워져있었다고 합니다. 하디드는 어린시절 그것들이 왜 다른 곳에서 본 가구들과 왜 달라 보이는지, 이 소파는 왜 일반 소파와 디자인이 다른지 궁금해했고, 자신의 방에 걸려있던 비대칭 거울의 디자인에 감격하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회상했어요.
자하 하디드의 아버지는 정치가였습니다. 1950~60년대에는 권력을 장악한 편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디드의 어릴적 기억에는 집으로 항상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늘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63년에 바트당(Ba'ath Party)이 이라크를 점령하면서 (네, 뉴스에서 많이 들었던 사담 후세인 그쪽입니다.) 국가의 권력자가 바뀜과 동시에 아버지의 정치인생도 끝이났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집이 몰락하고 그런건 아니었나봅니다. 이 무렵 부모님은 이라크에 남았으나 자하 하디드는 16살에 영국과 스위스의 기숙학교에 보내졌거든요. 아버지의 정치인생과 별개로 원래 유학이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르고요. 12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오빠는 이미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시절 자하 하디드는 오빠들과 런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랐습니다.
자하 하디드의 건축에 대한 관심은 6-7살 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고모가 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집을 아버지의 친구였던 건축가가 설계하던 것이었고, 아버지의 건축가 친구는 자하 하디드의 집에 도면이나 모형을 가지고 오곤 했었거든요. 본격적으로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건 11-12살 무렵이었습니다. 11살이면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놀던 때인데 그 때부터 진로를 정했다니 신기합니다.
1968년, 그러니까 자하 하디드가 18-19살이 되었을 때 하디드는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합니다. 11살부터 건축가가 되고 싶었는데 왜 수학을 전공했을까요. 그녀가 태어난 이라크 바그다드와 마찬가지로 레바논의 베이루트도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문화와 사상의 중심지긴 했지만, 그 시절 많은 나라들이 그랬듯 여성들이 고학력의 교육을 받는일은 지금처럼 많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건축과는 공학부에 속해있었죠. 더더욱 여성이 없는 분야였습니다. 자하 하디드는 그곳에서 자신이 유일한 여성이 되는 것이 싫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오빠들이 다니는 캠브리지 대학에 가고 싶지도 않았구요.
베이루트에서 대학을 다니던 자하 하디드는 1972년에 런던으로 이사합니다. 이 곳에서 오빠의 친구 추천으로 런던의 건축학교 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 라는 곳을 알게되죠. 지금도 건축학교로 유명한 AA, 그곳입니다.
AA는 1847년에 설립된 아주 역사가 깊은 영국 런던의 독립된 건축학교입니다. 첫 여성입학자가 들어온 해는 1917년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1972년에 자하 하디드가 입학할 당시에는 유일한 여성이 되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겁니다. 건축의 꿈을 펼칠일만 남은거죠.
여담으로 자하 하디드가 런던으로 이사가고 3년후인 1975년에 레바논은 내전으로 도시가 산산조각 닙니다. 더 뉴요커지의 존 시브룩 (John Seabrook)은 경관과 건물들이 내부에서 폭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디드의 초기 작품의 단편적이 측면은 그녀가 어린 시절과 젊은 여성으로서 가장 잘 알고 있던 도시에서 망명한 사실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했습니다.
2. 자하 하디드의 AA 건축학교 재학시절 (1972 ~ )
Q: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가가 되고 싶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성장배경과 성장과정에서 디자인 원칙과 철학을 형성한 특별한 측면은 무엇인가요? Zaha Hadid: 어렸을 때부터 건축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6-7살 때쯤 고모가 이라크 북부의 모슬이란 지역에 집을 짓는 모습을 본 것이 건축에 대한 첫 번째 기억입니다. 그 때의 건축가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고, 도면과 모형을 가지고 우리집에 오곤 했어요. 거실에서 모형을 본 기억이 나는데, 그 모형에 완전히 흥미를 느낀 것이 계기가 된 것 같아요. AA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저는 항상 파편화 개념과 추상적인 개념 및 폭발에 대한 아이디어에 관심이 많았고 반복과 대량생산에 대한 아이디어의 해체주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는 초기 러시아 아방가르드, 모홀리나기(moholy-nagi)이 회화,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proun', 나움 가보(naum gabo)의 조각품, 특히 예술과 디자인 사이의 현대 아방가르드 교차점을 대표하는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tch)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말레비치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수준의 창의적인 작업으로 나아갈 수있는 실험적인 원리로 추상화를 탐험해 나갔으며, 이 추상적인 작업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창의성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 출처: designboom 인터뷰 |
1972년부터 자하 하디드는 본격적으로 건축공부를 시작합니다.
하디드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던 시기의 영국은 1960년대 이루어진 도시계획과 공동주택에 대한 실험의 실패로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믿음이 쇠퇴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때 AA의 교수였던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 1944-)는 "모더니즘이 사망했다고 널리 선언된 순간이었고 아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으나 이 자체가 건축가로서 큰 장점"이라며 건축가로서는 변화하는 시기에 새로운 설레임과 용기를 심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자하 하디드는 베르나르 추미가 설계한 프랑스 파리의 라빌레트 공원 프로젝트에도 참여합니다.) 혼돈의 시기를 함께 보낸 교수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들 달랐는데요, 룩셈부르크 태생의 레온 크리에르(Leon Krier, 1946-)와 일부 교수들은 과거의 최상의 건물들을 보존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었고, 렘 쿨하스(Rem Koolhaas1944-), 엘리아 젠엘리스(Elia Zenghelis, 1937-),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 1946-)와 같은 건축가들은 모더니즘을 계속 연구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디드가 3학년이 되던해, 하디드는 과거 건축을 기술을 통해 잘 보존하자는 파(?)였던 레온 크리에르(Leon Krier, 1946-)의 스튜디오에 배정이 됩니다. 그는 추후 자하 하디드에 대해 "건축에 깊이 헌신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었다며, "또한 굉장히 활기차고, 수업시간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나중에 내 조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굉장히 힘들어했고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광장을 축소해서 이탈리아식 광장(piazza)으로 만드는 아이디어의 트라팔카 광장 프로젝트를 맡겼는데 전혀 그녀의 취향이 아닌 프로젝트였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크리에르의 회상을 통해 자하 하디드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자하 하디드가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갔다면, 우리는 자하 하디드의 극단적으로 뾰족하거나, 극단적으로 일렁이는 그러한 독보적인 디자인의 건축물을 볼 수 없었겠죠.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자하 하디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쯤 렘 쿨하스가 AA의 교수진에 합류합니다. 모더니즘을 계속 연구하고 싶어한 파(?) 중의 한명이었죠. 하디드는 쿨하스의 여러 강의에 참석하여 도시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하디드는 쿨하스의 강의에 영감을 받아 "한 사람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걸 엿볼 수 있었다"며 크리에르의 스튜디오에서 수업을 받으며 힘들어하던 하디드는 쿨하스에게 "크리에르의 건축에 대한 태도는 과거에 비해 더 잘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당신은 왜 굳이 새로운 건축을 위해 노력하느냐"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디드는 렘 쿨하스와 엘리아 젠엘리스가 맡고 있던 스튜디오로 옮기기 위해 쿨하스에게 요청합니다. 쿨하스는 하디드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쿨하스는 스튜디오의 다락방에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 하루에 몇 시간씩 그리게 하며 제도기술을 가르칩니다. (나라면 여기서 또 포기각) 모더니즘 건축이 휘청거리던 시기였어서 당시 대부분의 작업은 다른 건축가들 중에서도 건설된 가망이 없는 건물을 위한 프로젝트를 하거나, 쿨하스와 추미의 프로젝트를 연구하는데 쓰였습니다.
※ 렘 쿨하스Rem Koolhaas (1944.11.17.~)
네덜란드 건축가. 사실상 자하 하디드와의 나이차이는 6살 밖에 나지 않는다. AA 교수진으로 갔을 때 30대 초반 밖에 안되었다는 이야기. 1975년에 Elia and Zoe Zenghelis and Madelon Vriesendorp와 함께 OMA를 설립했다. 제21회 프리츠커상 수상자이다. 우리나라의 삼성 리움 미술관의 블랙박스가 있는 삼성아동문화교육센터를 설계했다.
이 당시에는 프로젝트에 대한 큰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5시간짜리 강의, 밤새도록 그림을 그리는 수업, 거칠고 엉뚱한 아이디어들로 분위기가 들끓었다고 하는데요, 자하 하디드는 "이때에 이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했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 대한 가치와 자신을 위협에 빠뜨리는 것에 대한 가치를 보여주었던 때였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연구의 일환으로 하디드의 스튜디오는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1879-1935)가 창시한 추상운동인 절대주의(Suprematism)를 연구했습니다. 말레비치는 층층이 쌓인 기하학적 덩어리를 그렸는데 1915년에 그가 처음 보인 하얀 들판의 단순한 검은 사각형 그림이 말레비치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입니다. 검은 사각형 그림이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이긴 하나, 하디드는 앞서 올려둔 올려진 카지미르의 훨씬 더 다층적인 이미지의 작품들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디드의 초기 설계작에서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은 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자하 하디드의 졸업작품과 초기 설계작에 대해 이해하려면 말레비치에 대해서 조금 더 알필요가 있습니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작품을 비(非)유클리트 기하학(non-euclidean geometry)의 연구로 제시했지만, 그 중심에는 일종의 공간 신비주의가 있습니다. 말레비치는 기하학을 병치함으로써 그림에서 세 번째, 네 번째 차원을 발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디드의 투시도와 초기 설계작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건축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1926년 비객관적인 세계(The Non-Objective World)에서 "그림에 외부의 표현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고 관계를 형성해 온 우월주의의 새로운 예술이 새로운 건축물이 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Architektons"라고 불리는 건물을 위한 일련의 추상 모델을 만들어 1920년대 중반에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히지만 1930년대 스탈린주의의 예술정책하에서 말레비치와 같은 추상예술가들은 사회현실과 계급투쟁에 관해 표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르주아로 판단되어 작품 전시가 금지되었죠. 그리고 말레비치는 1935년 암으로 인해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디드는 "Architektons"를 통해 무언가를 보았고, 말레비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자신의 프로젝트로 삼았습니다. 대부분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인 기하학적 모양을 유지하면서 다자인의 축척을 조정하고 도시적 맥락에 배치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그 후 10년간 그녀는 잉크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확대하고, 탄소 종이에 그림을 옮기고, 아크릴로 그리을 그리는 등 다양한 기술을 시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디드가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쿨하스는 하디드를 격려했습니다. 하디드는 후에 그 격려가 자신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주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가 한 사람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디드는 이후 프리츠커 연설에서 "나는 선을 포착하고 싶었다. 그리고 선을 따라가려고 하면 선이 빛과 그림자의 영역을 통과하면서 변형이 일어난다. 창문으로 건물을 바라보면서 따라가는 선이 공간에 의해 뒤틀리는 것, 그게 바로 제가 그림이나 Whooshing을 통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공간에서는 실제로 선이 여러갈래로 흩어지거나 휘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호불호가많이 갈리기도 합니다.)
※ 하디드가 그린 투시도를 보면 빛이 사라지는 듯한 그라데이션을 볼 수 있는데요, 이 효과를 내기 위해 하디드는 선 끝을 그려서 부드럽게 만들곤 했는데 그녀는 이 방법을 "Whooshing"이라고 불렀습니다.
1977년 AA에서의 마지막해에 하디드는 런던 헝거포드 다리 위에 펼쳐진 14층 호텔 "말레비치의 테크토닉"을 포함한 포트폴리오로 졸업상을 수상합니다. "구조물의 14개 층은 체계적으로 테크토닉을 고수하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제약을 새로운 공간 가능성으로 변화시킨다"는 설명으로 그 프로젝트는 건설되지는 않았지만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렘 쿨하스는 AA의 보고서에서 하디드에 대해 "모방할 수 없는 궤도에 있는 행성"이라고 기록합니다.
졸업 후 하디드는 렘 쿨하스의 회사 OMA에서 파트너 자리를 제안받습니다. 히지만 그녀는 OMA에 1년 정도만 머문 후 런던에서 자신의 단독 사무실을 오픈합니다. 길고긴 세월을 달려온 것 같지만 이때에 그의 나이 고작 서른 무렵이이었습니다. 😨
3.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의 시작 (1980 ~)
1980년 사무소를 오픈하고 한참 동안은 준공작이 없었습니다. 첫 준공작은 무려 14년후인 1994년에 지어집니다. 1980년대 이 시기에 하디드에게는 '페이퍼 아키텍트(paper architect)'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말그대로 지어지지 못하고 종이(도면)로만 머무는 건축가 인거죠. 자하 하디드의 설계는 디자인이 너무 아방가르드 하다거나, 높은 공사비를 필요로 하는 디자인이어서 공사로 이어지지 못하고 스케치나 도면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홍콩의 The Peak(1984), 독일 베를린의 Kurfürstendamm(1986), 뒤셀도르프의 Düsseldorf Art and Media Centre(1989-1993), 영국의 Cardiff Bay Opera House(1994)가 있습니다. 아래에서 각 프로젝트의 이미지와 글이 이어집니다.
▲ The Peak Project (1984)
오픈후 처음으로 국제공모에서 수상한 프로젝트가 1984년 홍콩의 The Peak 레저 클럽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어쩌면 하디드의 첫 당선작이 되지 못할뻔 했습니다. 원래 하디드의 제출안은 낙선작 상자에 들어가있었거든요. 심사위원 중 한명이었던 일본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Arata Isozaki, 1931-2022)가 낙선작 더미를 다시 보다가 발견하여 후보작으로 끌어올려졌다가 당선까지 하게된 일화가 유명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공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오직 당시 제출했던 투시도와 도면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어쨌거나 이 때의 일을 계기로 일본에서 자하 하디드를 주목하면서 작은 프로젝트인 <토미가야 빌딩>과 <아자부주반 빌딩> 설계를 맡게 되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이 프로젝트들 또한 공사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
🔗자하 하디드 홈페이지의 The Peak 관련 페이지 링크
🔗Google Arts & Culture의 The Peak 관련 페이지 링크
The Peak는 그동안 졸업작품은 물론 인터뷰에서도 많이 언급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와 말레비치의 회화 이념인 절대주의(Supermatism)에 영향을 받은 디자인입니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하디드는 2007년 디자인붐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프로젝트 중 첫 번째로 언급할 정도로 자신에게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로 담아두고 있습니다.
▲ 독일 베를린의 쿠르퓌루스텐담 오피스 빌딩 계획안: Victoria City Aerial (1986)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 참여한 설계공모에서의 자하 하디드의 작품 스타일은 졸업작품과 The Peak 때와 마찬가지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2000년대 그의 설계안에서는 곡선의 형태가 강조되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은 기하학과 해체주의, 절대주의(Suprematism)에 심취해 있으며, 이를 건축 설계에서 계속하여 테스트하고 접목시키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하 하디드 홈페이지의 Victoria City Aerial 관련 페이지 링크
▲ 뒤셀도르프 아트&미디어 센터: Zollhof Media Park (1989-1993)
투시도를 비롯한 이미지만으로는 이게 과연 건축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의 나열입니다. 하디드는 대부분의 투시도를 사람의 눈으로 받아 들 일 수 있는 1점 또는 2점 투시도가 아닌 많게는 5, 6점의 시점에서 투시도를 그렸습니다. 다양한 형태와 빛과 그림자로 인해 선이 이어지고 뒤틀리고 변형되는 본인의 철학과 의도하는 바를 표현하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혼란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어쨌거나 실제로 지어져야 하는 건축물이기에 건축으로서의 공간은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모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하나의 소실점을 모아지는 형태는 아닙니다.
🔗자하 하디드 홈페이지의 Zollhof Media Park 관련 페이지 링크
▲ Cardiff Bay Opera House (1994)
🔗자하 하디드 홈페이지의 Cardiff Bay Opera House 관련 페이지 링크
주차 공간과 일부 사무공간으로 보이는 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선들이 어긋나 있는 것을 도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저 삐뚤삐뚤하고 어긋난 선이 아니라, 투시도와 모형, 평면도 이 세가지를 통해 자하 하디드가 선으로 만들고 싶었던 공간에 대한 집요함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Deconstructivist Exhibition at MoMA (1988)
1988년 뉴욕의 현대미술관 MoMA에서는 Deconstructivist Architecture 라는 전시가 열립니다. MoMA의 첫번째 건축 큐레이터 이자 제1회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미국 건축가 필립존슨(Philip Johnson)이 객원 큐레이터 마크 위글리(Mark Wigely)와 함께 해체주의를 주제로 연 건축 전시입니다.
필립 존슨이 이 전시를 위해 선택한 건축가는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1932-),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1929-), 자하 하디드(Zaha Hadid,1950-2016), 렘 쿨하스(Rem Koolhaas,1944-),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ebeskind,1946-),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1944-), 울프 프릭스(Wolf D. Prix,1942-)가 이끌던 쿱 힘멜브로우(Coop Himmelblau)로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들은 모두 20세기 영향력 있는 건축가로 자기매김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공교롭게도 가장 어렸던 자하 하디드만이 유명을 달리했네요..)
7명의 건축가들의 작품 10개를 전시했으며, 자하 하디드의 작품은 첫번째 설계공모 당선작인 홍콩의 "The Peak"이 전시됩니다. MoMA는 컴퓨터가 건축가의 복잡한 형상을 구현하기 이전에 구성해낸 자하하디드의 정교한 표현력이 담긴 초안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때의 투시도를 MoMA가 소장하고 있습니다.(이 외에도 MoMA에서는 자하 하디드의 도면과 스케치등 총 24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한번 등장했던 이 이미지 입니다.
이 때의 전시 브로셔의 스캔본이 MoMA 홈페이지에 게시(링크)되어 있습니다. 더 궁금하신 분들은 자료를 통해 확인해보시구요, 무려 100장 분량이라 다 보진 못했습니다...
💡 글이 길어져서 이후 자하 하디드의 건축 작품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자하하디드의 첫 준공작인 비트라 소방서를 비롯하여 그 후로 이어진 다양한 작품들을 살펴보고, 일본으로 부터 반려당한 2020 도쿄올림픽 스타디움 설계에 대한 자하 하디드의 생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열심히 작성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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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해외 매거진과 인터뷰, 영상을 보고 발췌하여 재정리한 글입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작성한 글이오니, 그대로 가져가는 일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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